ARTIST 4-박창식

Where the story begins

pencil on paper
21 x 29.7cm (each)
2013

Park changsik
박창식

parkchangsik_@naver.com

Nothing, Like something,Happens anywhere

나는 도시라는 물리적 공간을 부유하는 한 개인의 관점으로 사적인 공간에 대한 기록들과 공적인 공간의 기록들을 모아 한 화면에 밀집시켜 제3의 공간을 그려낸다. 
나는 스냅사진, 웹과 신문, 서적들에서 이미지를 기록, 수집한다. 기억을 더듬어 특정한 지점을 떠올려 자료를 모으기도 하고, 그날그날의 이슈들을 모으기도 한다. 최근 작업에는 70-90년대 경제부흥기에 지어진 양옥들과 그것들이 빼곡히 모여 있는 낡은 구시가지, 불규칙하게 솟아오른 빌딩들, 정리 되지 않고 이리저리 널린 전선들, 사각의 콘크리트 마다 위태롭게 걸려있는 안테나 따위의 사물들과 용산참사, 후쿠시마 원전 사건과 같은 뉴스의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이는 내가 주로 거주하는 공간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과 어떠한 사건이나 당시에 나의 머릿속을 메우고 있던 이슈들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나의 작업 ‘Friendly fire’ 에는 네 가지 풍경이 공존한다. 한남동을 거닐며 우연히 노을지는 시각에 찍었던 건물풍경 / 집에 오는 길에 찍었던 상봉동의 어떤 건물 일부 / 작업실 뒤편으로 보이는 아차산 / 용산참사 때 시위대의 새총이 놓아져 있던 건물 옥상 풍경이다. 나는 연결 되지 않는 이 풍경들이 한 화면에 모여 있듯이, 우리가 거주하는 공간을 메우고 있는 물리적 덩어리들과 개인 저마다의 내면적 사고작용이 불일치하는 지점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불일치하는 일종의 ‘균열된 지점’을 현실에도 존재하지 않고, 가상의 세계도 아닌, 그 사이의 어느 지점에 위치한 풍경을 그려냄으로써 일상에 내재되어 있는 불안감을 드러내려 하였다. 
필립라킨(PHILIP LARKIN,1922-1985)은 일상의 삶을 소재로 시간과 죽음이라는 삶의 본질적 문제를 그려내었던 영국 시인이다. 그의 시 “I remember, I remember”는 시인이 자신의 고향인 영국 코번트리가 나치에 의해 파괴되고, 재건된 후 다시 돌아왔을 때 느꼈던 감상을 묘사한 것이다. 아래는 이 시의 한 구절이다. 
'Nothing, like something, happens anywhere.' 
'아무것도 아닌, 무언가 처럼, 어디서나 일어나는‘ 
나는 이 문장이 묘사하는 장소성에 대한 함의가 내 작업의 맥락과 결을 같이 한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어떠한 일이 벌어지지만, 침묵하는 장소로써의 풍경’. 
내 작업의 목적은 그 풍경 자체를 드러내는 것에 있지 않다. 그보다 그 풍경들에 시선이 머무르게 함으로써 사람들 개개인이 응시하고 있는 것과 여러 이슈들, 그리고 그 외에 무수한 일들에 대한 기억들, 그를 둘러싼 균열된 감정들을 반추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가 익숙하다고 이야기하는 풍경이 얼마나 낯설은 것인지를, 인식되기 어려운 것인지를 다시금 떠올려보기를 원한다. 본다는 것, 풍경의 의미를 다시금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2014 박창식

<부유하는 현실 속 풍경들 그리고 그것을 보는 시각에 대하여>

박창식 작가는 현실을 보는 시각에 대한 고민에서 작업을 해왔다. 그가 보아왔던 현실이라는 곳은 도시 공간의 풍경들이었다. 그런데 그의 작업에 등장하는 도시 모양은 특정한 도시의 일면이 아니라 도시의 이질적인 건축물들이 섞여 있는 모습들이며 그 건축물 이미지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면 웅장하게 들어서 있는 도시의 빌딩들에서부터 후미진 골목의 낡은 사무실이나 창고건물들에 이르기 까지 혹은 대규모 종합운동장의 펜스에서부터 공장이나 빌딩 건축현장의 기계설비처럼 보이는 시설물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도시 풍경들이 다양하게 한 화면 안에서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업에서는 심지어 만월과 반월 형태의 달이 나란히 등장할 정도로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상황을 그려내는 것을 보면 일견 현실처럼 보이는 그의 작업 속 도시 풍경은 사실 꿈이나 상상 속에서나 볼 수 있는 비현실의 세계이거나 현실의 편집된 변형임을 알게 된다. 건축물들을 각각 따로 살펴보면 현실 속 도시의 일면들인데 한 화면에 섞여서 등장하게 되자 신화 속 반인반수의 기괴한 동물 모습처럼 어색하고 기형적인 모습으로 다가옴을 느끼게 된다. 게다가 텅 비워진 듯 보이는 도시 풍경은 어두운 색조 때문인지 을씨년스러운 스산함마저 느껴진다. 여기에 간혹 등장하는 홀로 서 있는 인물의 뒷모습을 보게 되면 이 비워진 공간이 더욱 황막하게 다가온다. 

작가는 그의 작업에 대해 언급하는 가운데 현실의 여러 가지 단면들을 그려냄으로써 관객들이 작품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도록 열어두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언급을 다른 측면에서 읽어보면 작가의 작업은 같은 현실을 너무나 다르게 바라보고 있는 도시 공간 속 현대인들의 시각의 차이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작가는 파편화된 현대 사회에서 경험하게 되는, 마치 비현실처럼 보이는 분열된 현실을 그려낸 것이라는 말이다. 다원화된 현대 사회에서 느끼게 되는 것은 다양성을 존중 받는 것이기도 하지만 거꾸로 개인마다 현실 사회에 대한 시각 차이가 크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현대 사회에서는 같은 현실을 접하면서도 간혹 전혀 다른 현실 인식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절망감에 빠지게 되기도 한다. 특별히 우리 한국사회의 경우 사회적 사건이 일어날 경우에는 더욱 시각의 차이가 분명해 졌었기에 작가가 그려내는 현대 사회의 풍경은 그러한 사회적 시각에 대한 메타포일 수도 있다. 이데올로기처럼 사람들마다 가지고 있는 시각 프레임은 같은 현실을 전혀 다르게 보도록 만드는 것이 사실이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다른 시선은 아마도 이렇게 도시 풍경이 조화롭기 보다는 기형적으로 보이게끔 만들 수도 있을 것 같다. 유동적인 물질처럼 부유하는 이질적 풍경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화면에서 경쟁하듯 촘촘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우리 사회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또 다른 얼굴인 듯 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보면 박창식 작가의 작품 속 홀로 뒤돌아 서서 걸어가는 인물의 모습은 아마도 이처럼 다원화된 사회 속에서 현실 인식의 차이만을 확인하고 소통이 화두가 된 이 시대에 오히려 고립되어 버린듯한 현대인의 뒷모습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결국 박창식 작가에게 있어서 회화는 일상적 현실의 외형을 재현해 내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도시를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 사람들에 있어서의 사회적 현실을 도시 풍경을 통해 재매개 함으로써 다양한 시각이 공존하는 현실에 대해 직시하고 이를 관객과 대화하며 그것의 이면의 상황을 살펴보고자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이렇게 이 다원화된 세계에서 오히려 고립되어 버린 것 같은 우리 사회의 비현실적 상황이 작가에게 있어서는 직면한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듯한 아이러니한 상황을 그의 작업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부유하고 있는 것 같은 이 시대의 현실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사이미술연구소, 이승훈